농악은 애석하게도도시나 농촌의 현장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농악에 기반을 둔 사물놀이는 이러한 집단성과 현장성을 대체할 대안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농악의 현장성과 동참성이 없어지고 놀이꾼과 구경꾼이 분리되는 점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농악에 대한 보존과 활성화 문제는
놀이 공연을 가진 것은 1978년 2월 28일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열렸던 `제1회 공간 전통음악의 밤`에서였다. 이 무대에서 김용배(쇠), 김덕수(장고), 최태현(북), 이종대(징) 등 젊은 타악 국악인 4명은 `웃다리풍물[경기.충청]가락`을 발표했고 그날 공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이들이 보여준 진기하고도 신명
목을 매려고 한다. 결국 소매각시의 결백호소에 용서하며 소매각시의 결백을 인정한다. 수염으로 목을 감는 모습은 해학적이며 권위의 상징이었던 수염을 당기어 결백을 시인케 하는 내용은 풍자적이기도 하고 죽음의식을 초월한 희극화된 표현이다.
5. 제 5과장 :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화해
놀이 학습프로그램의 자료를 개발하고 확충하여 적극적으로 시행하게 되면 학생들의 학업성취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시사 받았다.
이와 같은 선행연구들은 전통놀이프로그램이나 놀이가 아동들의 자아개념, 사회성, 기본 생활습관, 적응행동들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시사하고
농악’이라고 일컬어져 그 말이 일반화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국립국악원과 국악교육협의회에서 국악내용 통일안을 마련해 ‘농악’이라고 하던 것을 ‘풍물놀이’로 바꾸어 부르기로 했다.
풍물놀이는 성행과 쇠퇴를 거듭하다가 1970년대에 대학가에서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현재에
굿을 가르쳤다. 14세때부터 박학삼 밑에서 풍물굿을 배우며 끝쇠를 치던 양순용이 18세부터 상쇠를 이어받았다. 양순용은 필봉의 풍물굿이 지금과 같이 짜임새 있는 규모와 형태를 갖추고 활동을 하게 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양순용은 1955년 지병으로 타게 하자 그의 장남인 양진성이 필봉농악
농악(농악놀이, 풍물, 굿)의 기원
농악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의 생활속에 깊이 스며들어 뿌리박고 전해 내려온 민족예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농악의 기원과 발달을 정확히 기록한 문헌은 없다. 아마도 서민계층에서 발생, 발달하였기 때문에 자세한 문헌을 기록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도 하다. 최근 전통음악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활발한 공연활동, 그리고 교육과정 개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학교현장에서 전통음악교육의 강화는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농악과 사물놀이는 학교 현장에서 전통음악의 교육적 가치를 인정받아 음악수업과 특별활동을 비롯하
굿이나 서냥굿과 같은 마을굿으로 연행되고 또 마당밟이·걸림굿·호미걸이·판굿과 같이 민속축제나 민속놀이로 연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민속학에서 타악기 풍장을 연주하며 행하는 의식이라거나 민속놀이로 인식하는 것이 바르다고 하겠다. 한편 농악에는 공연적인 특성이 강하여 음악부문 밖에도